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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산성의 재발견 (참기름 밀폐병, 고려 유물 분석, 산성 명칭 복원)

by oboemoon 2026. 2. 15.

강원도 산악 지대의 깊은 곳에 자리한 한계산성은 800여 년 전 대몽 항쟁기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국립 중원문화재 연구소의 발굴 조사를 통해 청동 기물과 함께 마개가 닫힌 밀폐병이 발견되었고, 그 안에는 고려인의 삶과 전쟁을 증언하는 특별한 물질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 발견은 단순한 유물 출토를 넘어 역사 기록과 물질 증거가 만나는 지점이자, 잊힌 산의 이름을 되찾는 계기가 되고 있습니다.

 

참기름 밀폐병, 800년 전 고려인의 삶을 증언하다

 

한계산성 대궐터 인근에서 발굴된 160여 점의 유물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청동 수저와 잔, 그리고 마개까지 온전하게 닫혀 있는 작고 둥그런 병입니다. 국립 중원문화재 연구소 연구원들은 이 병을 발견한 순간부터 특별함을 직감했습니다. 윤영준 학예사의 설명에 따르면 한계산성 상성의 현장 조사 중 마상배 한 꼬지가 일부 노출되어 있었고, 그 수습 과정에서 청동 숟가락과 병까지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미국 연구소에 의뢰한 연대 측정 결과, 이 병 속의 물질은 1200년대 고려 시대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이는 고려사에 기록된 한계산성 전투의 시기와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병 속에서 꺼낸 물질은 되직하고 미끄러운 액체류, 즉 기름이었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산패 현상이 일어났지만 그 본질은 여전히 확인 가능했습니다. FTIR 분석을 통해 카르복실기가 특징적으로 나타났고, 참깨 기름에 많이 함유된 항산화 물질인 세사민이 검출되면서 일차적으로는 참기름이 함유되어 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이 발견은 단순히 유물의 형태적 가치를 넘어서는 의미를 갖습니다. 대몽 항쟁기, 산성으로 몸을 피한 고려인이 소지하고 있던 밀폐병이라는 점에서 당시 사람들의 생활상과 심리 상태를 추측할 수 있는 귀중한 단서가 됩니다.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도 참기름을 챙겨 올라갔다는 사실은 그것이 단순한 식용유가 아니라 제의, 의료, 조명 등 다목적으로 활용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연구진의 추정에 따르면 제단에 제를 지낼 때 사용하는 유밀과의 재료로 참기름을 사용했을 것이며, 제단의 등불을 밝히기 위해서도 사용되었을 것입니다. 참기름은 벌레가 잘 모이지 않는다는 특성이 있어 등불용으로 적합했고, 고약을 만들 때 여러 가지 약재와 함께 달여서 의료용으로도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고려 유물 분석, 과학과 역사의 교차점

 

한계산성에서 출토된 청동 기물들은 원형 그대로 남아 있어 당시 실생활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수저와 잔은 고려 시대 상류층의 식생활 문화를 보여주며, 특히 대궐터 인근에서 발견되었다는 점은 이곳이 단순한 피난처가 아니라 일정한 계층적 구조를 갖춘 공간이었음을 시사합니다. 윤은영 연구원과 송준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성분 분석 과정에서 참기름 외에도 다른 식물성 기름이 함유되어 있을 가능성이 발견되었습니다. 이는 당시 고려인들이 다양한 식물성 유지를 활용했을 가능성을 열어줍니다.
과학적 분석 방법의 도입은 역사 해석에 새로운 차원을 제공합니다. FTIR(푸리에 변환 적외선 분광법) 분석과 세사민 검출은 단순히 "기름이다"라는 추측을 넘어 "참기름이다"라는 구체적 물질 동정으로 연결되었습니다. 이러한 과학적 접근은 문헌 기록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물질 증거로서의 역사를 구축하는 과정입니다. 연구진은 이 유물이 고려사에 나와 있는 한계산성 전투와 관련된 유물 중에서 역사 시기가 정확하고 당시 상황을 알려주는 희소한 유물이라고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과학적 분석에도 해석의 경계는 존재합니다. 참기름의 용도를 제의용, 등불용, 의료용으로 추정하는 과정에서 "~하지 않았을까"라는 표현이 반복되는데, 이는 증거와 가설 사이의 간극을 보여줍니다. 고고학적 해석은 언제나 일정 수준의 추론을 동반하지만, 어디까지가 물질적 증거이고 어디부터가 맥락적 상상인지를 명확히 구분하는 것은 학술적 엄밀성을 위해 필수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계산성에서 발견된 밀폐병과 그 안의 참기름은 800여 년 전 고려인의 삶이 추상적 기록이 아니라 손에 잡히는 물질로 현재와 연결되는 강력한 매개체임에는 분명합니다.

 

산성 명칭 복원, 한계산의 독립적 정체성을 찾아서

 

한계산은 설악산 국립공원에 포함되어 있지만, 역사적으로는 독립된 산으로 인식되어 왔습니다. 1861년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여지도에는 설악산과 더불어 한계산의 표기가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으며, 팔도지도 역시 양의 설악산과 인재의 한계산을 별개로 명시하고 있습니다. 이상균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조선 초기부터 고지도에도 별대 독립산, 즉 독립된 산으로 표기되어 있었습니다. 신라 시대에는 한계사지라는 사지 이름도 보이고, 한계리라는 지역 공동체의 마을 지명도 존재했습니다. 이는 한계산이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독립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1965년 설악산 천연 보호 구역이 문화재로 지정되고 1970년 설악산 국립공원이 지정되면서 인제의 한계산이 전부 설악산 국립공원 지구에 포함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외지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 한계산은 설악산의 일부로 흡수되었고, 대외적으로 한계산이라는 명칭은 잘 쓰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현대에 와서 설악산 국립공원이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지면서 한계산이라는 명칭은 말 그대로 역사 속에 묻혀버린 명칭으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탐방단원들은 산성 절벽에 서서 한계산 정상을 바라보며 "이 높은 데 산성이 있다는 것도 상상불허"라며 놀라움을 표현했고, "설악산 국립공원이 아니라 설악산 한계산성 국립공원으로 바꿔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까지 제시했습니다.
인제 현지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설악산보다는 한계산이라는 명칭을 더 익숙하게 알고 있다는 점은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합니다. 지역민들의 기억 속에 살아있는 이름과 공식적인 행정 명칭 사이의 괴리는 역사적 정체성의 단절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안산이라는 난데없이 부여된 무미한 이름표는 지역민들에게조차 낯선 지명입니다. 한계산이라는 독립적인 산의 지위를 회복하는 것은 단순히 과거의 명칭을 복원하는 차원을 넘어, 역사적 맥락과 문화적 정체성을 되찾는 작업입니다. 다만 이미 수십 년간 형성된 지리적·문화적 인식 또한 하나의 역사이므로, 명칭 복원은 사회적 합의와 현재의 맥락 속에서 신중하게 접근해야 할 과제입니다.
한계산성의 발굴과 유물 분석은 역사가 머리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감각으로 와닿는 경험을 제공합니다. 병 속의 참기름은 800여 년 전 고려인의 불안과 희망, 신앙과 생존의 의지를 동시에 담고 있는 물증입니다. 과학과 역사의 교차점에서 우리는 문헌 기록을 넘어선 물질의 증언을 듣게 되며, 잊혀진 산의 이름을 되찾는 과정에서 역사적 정체성 회복의 의미를 되새기게 됩니다.


[출처]
영상 제목/채널명: https://youtu.be/PFe4-FUb3Ic?si=9kdn-evuwcf_6d0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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