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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국 추상미술 (고독한 선택, 밀도의 시간, 자연의 기억)

by oboemoon 2026. 3. 3.

유영국은 1930년대부터 2002년까지 한국 추상미술의 역사 그 자체를 살아낸 화가입니다. 400여 점의 작품을 남긴 그의 삶은 단순한 예술가의 여정이 아니라, 시대를 거스른 결단의 연속이었습니다. 저는 최근 그에 관한 다큐를 보면서 추상화에 대해 갖고 있던 막연한 편견이 완전히 깨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솔직히 그동안 저는 추상화를 보며 "이게 왜 대단하지?"라고 생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삶을 따라가며 작품을 보니, 색면 몇 개 속에 숨겨진 시간과 태도가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고독한 선택

1935년 도쿄 문화학원에 입학한 유영국은 당시 대부분의 조선인 화가들이 선택하던 인상주의나 구상 회화가 아닌, 추상이라는 길을 택했습니다. 군국주의 이데올로기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환경 속에서 서구 모더니즘과 전위미술을 접한 그는 대상의 재현을 거부하고 선과 면, 색채만으로 화면을 구성하는 방식에 매료되었습니다. 데뷔작인 「랩소디」를 통해 일본 전위 미술계에서 주목받으며 김환기 등과 교류했고, 자유미술가협회 활동에도 참여했습니다.

하지만 태평양전쟁이 격화되자 그는 귀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울진으로 돌아온 그는 한동안 그림을 그리지 않았습니다. 고깃배를 타고 양조장을 운영하며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안 그릴 자유도 있다"고 말했지만, 그림을 그리지 못하는 삶은 분명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묘하게 큰 울림을 받았습니다. 보통 예술가는 평생 붓을 놓지 않는 존재라고 막연히 생각했는데, 그는 현실의 무게 앞에서 한동안 멈춰 서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다시 돌아왔다는 점이, 오히려 더 단단하게 느껴졌습니다.

전쟁 후에도 생계를 위해 사업을 이어가야 했지만, 결국 그는 가족을 이끌고 상경해 다시 작업에 몰두하기 시작합니다. 1950~60년대 한국 화단은 이념과 학맥 중심의 구조 속에서 혼란스러웠고, 그는 동료들과 개혁을 모색했으나 곧 단체 활동을 멈추고 작업에만 집중했습니다. 1964년 48세에 첫 개인전을 열어 대형 추상 작품을 선보였고, 강렬한 색면과 구조적 화면으로 당시 화단에 충격을 주었습니다.

밀도의 시간

약수동의 작은 화실에서 유영국은 대형 캔버스를 세워놓고 물감을 두텁게 올렸습니다. 색 하나가 작품 전체를 좌우한다고 믿으며, 반복과 기다림 속에서 완성에 다가갔습니다. 그는 색을 정하기 위해 수없이 덧칠하고, 또 기다렸습니다. 화면의 밀도를 높이는 일은 속도와는 정반대의 작업이었습니다.

저는 이 지점에서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늘 빨리 인정받고 싶어 했고, 눈에 보이는 성과가 없으면 불안해했습니다. SNS에 올린 글의 조회수를 확인하고, 반응이 없으면 금방 다음 주제로 넘어가곤 했습니다. 그런데 유영국은 오히려 "안 팔리니 충분히 생각할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습니다. 성공보다 작업의 밀도를 먼저 생각하는 태도,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저는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홍익대 교수로 재직하던 그는 작업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스스로 사직했습니다. 제자들에게도 제작의 밀도와 태도를 강조했던 그는, 결국 좁은 화실에서 거대한 자연과 맞서는 긴장감을 작품에 스며들게 했습니다. 1975년 첫 판매 이후 점차 대중적 인지도가 높아졌지만, 오랜 무명과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그는 속도를 내지 않았습니다. 상업적 성공보다 탐구를 택한 것입니다.

자연의 기억

유영국의 추상은 점차 한국 자연의 기억과 결합했습니다. 울진의 산과 바다에서 받은 인상이 화면 속에서 선과 면, 색의 구조로 환원되었습니다. 산은 구체적 형상을 지우고 본질적 형태로 남았습니다. 태양은 푸르게 빛났고, 산은 단단한 색면으로 솟아올랐습니다. 그의 작품을 보면 자연이 재현되어 있지는 않지만, 자연을 마주했을 때의 감각이 색과 형태 속에 압축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다만 저는 모든 색과 형태를 고향의 산과 바다로 환원하는 해석 방식에 대해서는 조금 다르게 생각합니다. 추상은 본래 다의적인 해석을 허용하는 영역인데, 특정 의미로 방향을 잡아주면서 오히려 작품의 열린 가능성을 좁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관객이 스스로 해석할 여지를 조금 더 남겨두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말년에 심장병과 뇌출혈 등 큰 병을 겪으면서도 그는 작업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휠체어에 의지해 물감을 올리고 또 올리며 화면의 완성도를 높였습니다. 노년의 작품은 이전보다 서정적이고 평화로운 색조를 띠지만, 여전히 밀도와 긴장을 유지했습니다. 그는 예술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야 한다고 믿었고, 끊임없이 새로움을 모색했습니다.

단순한 형태 속 복잡한 무게

유영국의 삶은 격동의 현대사와 맞물려 있습니다. 식민지, 전쟁, 가난, 제도적 한계 속에서도 그는 추상이라는 한 길을 평생 지켰습니다. 400여 점에 이르는 작품은 색과 형태만으로도 감동을 줄 수 있다는 믿음의 기록입니다. 그는 "각자가 자기 일을 하면 된다"라고 말하며, 시대를 살다 가는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몫을 다했을 뿐이라 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 이런 서사는 지나치게 이상화된 측면도 있습니다. 추상의 길을 끝까지 지킨 고독한 예술가라는 이미지가 반복되면서, 그의 선택이 지닌 현실적 계산이나 전략적 판단 가능성은 거의 다뤄지지 않았습니다. 예술적 신념이 중심이었겠지만, 당시 화단의 흐름과 시장 구조 속에서 어떤 위치를 점했는지에 대한 분석이 더 있었으면 균형이 맞았을 것 같습니다.

또한 "안 팔리니 충분히 생각할 수 있었다"는 말이 인상적으로 제시되었지만, 그 이면의 경제적 조건이나 가족의 부담 같은 현실 문제는 상대적으로 가볍게 지나간 느낌이었습니다. 예술가 개인의 결단을 강조하는 서사 속에서, 그 결단을 가능하게 했던 사회적·물질적 배경에 대한 비판적 시선은 부족했다고 봅니다.

유영국의 작품을 보며 저는 단순한 형태 속에 얼마나 복잡한 무게가 담길 수 있는지를 배웠습니다. 추상화를 이해하지 못했던 과거의 저에게, 이제는 조금 다른 눈으로 그림을 볼 수 있는 실마리가 생긴 것 같습니다. 결국 예술은 형태가 아니라 그 형태를 만들어낸 시간과 태도에서 나오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의 묵묵한 실천은 한국 모더니즘 미술의 토대를 세운 결정적 여정으로 남았고, 저 역시 제가 하는 일에서 밀도와 기다림의 가치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다음번에 미술관에 가게 된다면, 추상화 앞에서 조금 더 오래 서 있어 볼 생각입니다.


참고: https://youtu.be/fjyIeOAWKFg?si=L4kKa-NiNOOGv88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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