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함안의 말이산 고분군은 잊혀졌던 아라가야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역사의 현장입니다. 특히 13호분에서 출토된 수레바퀴 토기와 그릇받침은 단순한 유물을 넘어, 아라가야가 독자적인 기술력과 미적 감각을 갖춘 문화 강국이었음을 증명합니다. 이 토기들은 함안을 넘어 남원, 일본까지 전해지며 고대 동아시아 교역망의 중심에 아라가야가 있었음을 입증합니다.
말이산 고분에서 발견된 아라가야의 상징
말이산 고분군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13호분은 아라가야 역사를 가장 생생하게 전하는 공간입니다. 돌로 만든 무덤방 안에는 피장자가 동쪽에 안치되어 있었고, 머리 쪽에는 각종 유물을 함께 묻은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출토된 그릇받침은 현재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소장될 정도로 완성도가 높습니다.
특히 주목할 만한 유물은 수레바퀴 토기입니다. 굽다리 위에 뿔잔을 얹고 양쪽에 수레바퀴를 붙인 이 토기는 실생활 용도가 아닌 제의용으로 제작되었습니다. 죽은 자의 영혼을 다른 세계로 실어 보내는 의미를 담고 있는 이 토기는 아라가야를 상징하는 대표 유물이 되었습니다. 이는 아라가야가 실용성뿐 아니라 정신세계와 신앙까지 토기에 담아낸 고도의 문화적 성취를 이룬 사회였음을 보여줍니다.
놀라운 사실은 이러한 아라가야 토기가 함안이 아닌 전북 남원에서도 발견되었다는 점입니다. 2019년 발굴된 남원 천계 고분군에서는 대형 고분과 함께 아라가야 토기 파편들이 다수 확인되었습니다. 특히 그릇받침 토기의 형태와 무늬가 말이산 고분 출토품과 거의 동일했고, 수레바퀴 토기 파편도 발견되었습니다. 이는 아라가야의 명품 토기가 남원 지역 지배층의 무덤에 부장될 정도로 높은 가치를 지녔음을 의미합니다. 아영 분지가 교통과 군사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아라가야 토기가 단순한 교역품을 넘어 정치적·외교적 의미를 지녔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대규모 생산체제를 갖춘 토기 산업의 중심지
아라가야 토기가 널리 유통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압도적인 생산 능력이 있었습니다. 함안 장명리와 법수면 일대에서는 수많은 토기 가마터와 폐기장이 발견되었습니다. 반경 1.5km 안에만 가마터가 16곳이나 밀집되어 있었고, 한 가마터에서만 수 톤에 달하는 토기 파편이 출토되었습니다. 이는 특정 시기에 대규모 토기 생산 집단이 형성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며, 현대적인 개념으로 보면 국가 단위의 산업 단지에 가까운 모습이었습니다.
출토된 토기들을 복원해 보니 그 종류도 매우 다양했습니다. 작은 항아리부터 대형 항아리, 컵형 토기, 조리용 토기까지 대부분이 실생활에 사용된 것들이었습니다. 특히 목이 짧은 단경호가 전체의 약 70%를 차지했는데, 표면에는 승석무늬나 새끼줄 무늬처럼 섬세한 문양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 문양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토기를 두드려 형태를 만들고 흙이 도구에 달라붙는 것을 막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흔적이었습니다. 아라가야 토기는 기술과 실용, 미적 감각이 결합된 결과물이었습니다.
가야는 여러 나라가 공존한 연맹체였던 만큼, 지역마다 토기의 특징도 달랐습니다. 그중 아라가야 토기의 가장 큰 특징은 굽다리에 뚫린 불꽃무늬였습니다. 이는 굽는 과정에서 토기가 터지는 것을 막기 위한 기능적 장치였지만, 동시에 아라가야만의 강한 시각적 정체성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체계적인 생산 시스템과 독자적인 디자인 언어는 아라가야가 단순히 토기를 만드는 것을 넘어, 하나의 '브랜드'를 구축했음을 의미합니다. 기술력과 정체성이 결합된 이 생산체제는 아라가야를 고대 동아시아 토기 산업의 선두주자로 만들었습니다.
해양 교류를 통한 문화 전파와 영향력
함안은 내륙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활발한 해양 교류가 가능했습니다. 그 비밀은 질날 늪이었습니다. 아라가야 시대 이곳은 늪이 아니라 물길이었고, 남강과 낙동강으로 이어지는 수로망의 중심이었습니다. 이 물길을 따라 아라가야 토기는 영남 전역과 일본까지 유통되었습니다. 아라가야 토기는 국제 교역품이었고, 일본의 경질 토기 문화 형성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 불꽃무늬 토기는 일본으로까지 전해졌고, 고대 일본은 이를 모방하려 했지만 완전히 재현하지는 못했습니다. 결국 아라가야 토기는 일본에서 하나의 '브랜드'로 인식되었습니다. 이는 아라가야가 고립된 소국이 아니라 활발한 교류의 중심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토기를 통해 기술과 문화를 전파한 아라가야는 제의와 신앙, 그리고 죽음 이후의 세계까지 담아낸 세계관을 주변 문명에 전달했습니다.
하지만 6세기에 들어 아라가야는 신라와 백제라는 두 강대국 사이에서 점차 압박을 받게 됩니다. 529년 국제 회의를 열어 생존을 모색했지만 외교적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고, 관산성 전투 이후 결국 신라에 투항하게 됩니다. 그렇게 500여 년을 이어온 아라가야는 역사 속에서 사라졌습니다. 이는 힘만으로 역사가 결정되지 않는다는 현실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정치적 패배가 문화적 소멸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사실도 입증합니다.
나라는 사라졌지만 아라가야의 문화와 기술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멸망 이후 많은 아라가야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기술과 문화를 전했고, 그 흔적은 일본 각지의 유적과 신사에 남아 있습니다. 나라가 사라진 뒤에도 문화와 기술은 살아남아 새로운 땅에서 이어졌습니다. 말이산 고분군은 단순한 무덤이 아니라, 잊혀졌던 아라가야의 위상과 가치를 다시 말해주는 증거입니다.
아라가야는 패배한 나라가 아니라 끝까지 자신들의 문화를 남긴 나라로 재평가되어야 합니다. 독자적인 미감과 정체성을 가진 문화 강국이었던 아라가야의 정교한 토기는 일본에서조차 쉽게 모방하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이 역사를 어떻게 기억하고 이어갈지는 이제 우리의 몫입니다.
[출처]
영상 제목/채널명: https://youtu.be/G_R_l5DqyGM?si=g_tAGSkBVA-AuUX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