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깊은 산중에 위치한 봉암사는 단순한 사찰을 넘어 생명과 공존하는 특별한 공간입니다. 82년간 인간의 출입을 제한한 이곳은 600여 종의 희귀 식물과 다양한 야생동물이 조화롭게 살아가는 생태의 보고가 되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봉암사가 보여주는 공존의 방식과 그 속에 담긴 깊은 철학적 의미를 살펴봅니다.
봉암사가 보여주는 공존의 철학
시향산 깊숙이 자리한 봉암사는 겨울 동안거 기간이 되면 세상과의 모든 길을 스스로 끊습니다. 혹한의 눈바람만이 오가는 이 시간 동안, 사찰은 인간만의 공간이 아닌 모든 생명의 무대로 변모합니다. 대웅전 처마 밑에는 올빼미가 둥지를 틀고, 산새들은 익숙한 날갯짓으로 날아와 스님들이 나눠준 쌀을 먹습니다. 봉암사는 기꺼이 새들과 양식을 나누며 혹한의 겨울 스스로 어미가 되고 숲이 됩니다.
공존이라는 단어는 우리 시대에 자주 언급되지만, 그 실천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봉암사의 공존은 인간이 자연을 소유하거나 관리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그 안에 잠시 머무는 존재로 스스로를 낮추는 태도에서 시작됩니다. 스님들이 개미 한 마리조차 밟지 않으려 발걸음을 멈추는 장면은 인간의 기준으로 보면 비효율적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야말로 자연의 질서를 있는 그대로 신뢰하는 방식입니다.
대웅전 천장의 종이학이 어치의 장난감이 되어도 스님들은 이를 탓하지 않습니다. 다람쥐와 어치가 자유롭게 공간을 누비는 모습은 함께 공간을 쓴다는 것이 서로에게 익숙해지는 과정임을 보여줍니다. 문이 열려 있는 봉암사는 인간만의 공간이 아니라 모든 생명이 동등하게 존재하는 세계입니다. 이는 자연을 '지켜야 할 대상'이 아니라 '이미 완성된 세계'로 바라보는 관점의 전환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자연과 함께 산다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얼마나 통제하려 드는지, 보호라는 명목으로 행하는 행동들이 과연 자연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인간의 불안을 덜기 위한 선택은 아닌지 질문하게 됩니다.
둥지를 둘러싼 자연순환의 드라마
봄이 찾아오면 봉암사 숲은 생명의 향연을 시작합니다. 산개구리가 긴 겨울잠에서 깨어나고 할미꽃이 고개를 내밀며 꽃망울이 터집니다. 목탁처럼 울리는 소리는 까막딱따구리가 늙은 소나무에 둥지를 쪼는 소리입니다. 수컷이 둥지를 파는 동안 암컷은 밖에서 장단을 맞춥니다. 까막딱따구리가 선택한 고목은 건강한 숲의 증거이며, 봉암사 숲이 살아 있음을 증명합니다.
하지만 둥지를 둘러싼 경쟁은 치열합니다. 동고비가 진흙으로 둥지 입구를 막고 침입을 시도하고, 까막딱따구리는 이를 쪼아내며 둥지를 지킵니다. 결국 치열한 공방 끝에 둥지는 지켜지지만 잠시도 쉴 틈은 없습니다. 짝짓기는 짧고 은밀하게 이루어지고, 마침내 새 둥지에서 알을 낳고 번식에 성공합니다. 그러나 또 다른 침입자가 나타납니다. 원앙입니다. 둥지를 차지하려는 원앙의 집요한 시도 끝에 까막딱따구리는 결국 둥지를 포기합니다.
원앙들은 한 둥지에 여러 마리가 알을 낳는 집단 산란, 에그 덤핑을 합니다. 둥지 안에는 30여 개의 알이 쌓이지만, 과도한 산란으로 온도와 산소 공급에 문제가 생기고 대부분의 알은 썩습니다. 한 달에 걸친 원앙의 노력은 실패로 끝나고, 버려진 알은 개미들의 먹이가 됩니다. 스님들은 그 알껍질조차 치우지 않습니다. 죽음 또한 숲의 순환이기 때문입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자연을 감정적으로 소비하지 않는 태도의 중요성을 발견합니다. 새끼를 잃는 장면이나 포식의 순간을 슬픔이나 비극으로 과장하지 않고, 하나의 순환으로 담담히 제시함으로써 인간 중심적 감정을 내려놓게 합니다. 둥지를 빼앗긴 까막딱따구리는 다시 고목을 찾아 새 둥지를 파고, 이 둥지 파기는 숲의 순환을 돕는 역할도 합니다. 자연에는 실패도 성공도 아닌, 그저 연속되는 과정만이 존재합니다.
큰 소쩍새가 증명하는 비개입 원칙의 가치
밤이 되면 봉암사는 큰 소쩍새의 시간이 시작됩니다. 수컷은 먹이를 나르고 암컷은 알을 품습니다. 암수의 역할은 분명하고, 산통 속에서도 암컷은 새 생명을 낳습니다. 수컷은 밤마다 개구리와 먹이를 사냥해 둥지로 나릅니다. 여름 장마가 시작되면 두꺼비와 곤충들이 봉암사 마당을 채우고, 비 오는 날은 큰 소쩍새에게 시련이지만 암컷은 미리 저장해 둔 먹이로 새끼들을 지킵니다.
새끼들이 자라 둥지를 떠날 시간이 오자 어미는 먼저 둥지를 떠나 새끼들을 유도합니다. 하나둘 날아오르지만, 막내는 끝내 올빼미의 먹이가 됩니다. 숲에서는 먹는 일도 먹히는 일도 질서입니다. 살아남은 새끼들은 봉암사 숲의 구성원이 됩니다. 여름이 깊어지고 스님들은 다시 참선에 듭니다. 인간의 움직임이 멈춘 사이, 숲은 더 풍요로워집니다. 하늘다람쥐, 뱀, 토끼가 자연스럽게 공간을 오갑니다.
인간의 개입이 사라질수록 생태계가 스스로 균형을 회복해가는 모습은 '보호'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만듭니다. 보호란 더 많은 규칙과 통제가 아니라, 때로는 물러나는 용기일 수 있다는 메시지가 분명하게 전달됩니다. 봉암사 숲은 82년간 사람의 출입을 제한한 결과 600여 종의 희귀 식물을 품게 되었습니다. 고란초와 꼬리진달래가 피고, 봉암사는 백두대간의 중심에서 거대한 생태의 품이 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분명한 질문도 남습니다. 봉암사는 특수한 수행 공동체이자 오랜 시간 외부와 단절되어 온 공간입니다. 이러한 조건이 없는 일반 사회에서도 과연 같은 방식의 공존이 가능할지, 그리고 이미 파괴된 환경 앞에서 인간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합니다. 모든 개입이 잘못된 것은 아니며, 때로는 적극적인 선택과 책임 있는 행동이 요구됩니다. 인간이 물러나야 할 지점과 반드시 책임져야 할 지점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가을이 오면 모든 생명은 겨울을 준비합니다. 숲에는 먹이가 지천이고, 봉암사는 필요한 만큼만 거둡니다. 겨울이 다시 찾아오고 생명의 활동은 멈춘 듯 보이지만 봉암사의 시간은 흐릅니다. 긴 겨울 봉암사는 무생명을 품고 앉아 새들을 위한 밥상을 차립니다. 자연에는 내 것과 네 것이 없습니다. 봉암사는 숲을 보듬고, 숲은 절을 살리며, 그렇게 서로 생명을 주고받습니다.
봉암사의 이야기는 명확한 해답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대신 삶의 태도를 묻습니다. 더 많이 가지려는 선택이 아니라 덜 개입하고 덜 소유하는 선택이 가능할지, 그리고 그 선택을 감당할 준비가 우리에게 있는지를 조용히 되묻는 메시지입니다. 봉암사처럼 오랜 시간을 들여 기다릴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자연과 관계를 맺어야 할지 고민이 필요합니다.
[출처]
KBS 다큐멘터리: https://youtu.be/jjdapCMG5wA?si=mGsV4YmCr3pTPn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