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룩셈부르크 여행 (성벽 도시, 비안덴 성, 옛것과 신식의 조화)

by oboemoon 2026. 3. 19.

솔직히 저는 룩셈부르크라는 나라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게 없었습니다. 제주도 1.5배 크기의 작은 나라인데 1인당 국민소득이 10만 달러가 넘는다는 정도만 들어봤을 뿐이었죠. 그런데 최근 다큐멘터리를 통해 룩셈부르크를 간접 경험하면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단순히 부유한 소국이 아니라 오랜 역사와 아픔, 그리고 독특한 정체성을 지닌 나라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성벽으로 둘러싸인 요새 같은 도시

룩셈부르크 다운타운은 50미터 높이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마치 거대한 요새 안에 작은 마을이 통째로 들어앉은 모습인데, 처음 보는 순간 현실감이 없을 정도로 신비로운 풍경이었습니다. 아르메 광장에서는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거리 연주에 맞춰 춤을 추고, 대공 궁전 앞에서는 관광객들이 소박한 건물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습니다. 생각보다 화려하지 않은 대공 궁전의 모습이 오히려 인상적이었습니다.

노트르담 대성당에서는 마침 미사가 진행 중이었는데, 가톨릭 신자가 아니더라도 평온함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었다고 합니다. 특히 옥타브라는 가톨릭 전통 행사 기간에는 이틀에 한 번씩 성모 마리아상의 옷을 갈아입힌다는 이야기가 흥미로웠습니다. 페스트가 돌았던 시절 사람들이 성모 마리아에게 기도를 올렸던 역사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전통의 무게가 느껴졌습니다.

헌법 광장의 황금 여신상은 1차 세계대전 희생자를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가 2차 대전 때 나치에 의해 파괴됐고, 나중에 축구장 바닥에서 우연히 발견돼 복구됐다고 합니다. 룩셈부르크가 한국전쟁 참전국이라는 사실도 이번에 처음 알게 됐습니다. 약소국이지만 다른 나라의 아픔에 눈감지 않았던 그들의 정신이 존경스러웠습니다.

아돌프 다리는 1903년 완공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아치교였다고 하는데, 최근에는 다리 밑에 자전거와 보행자를 위한 통로를 추가로 만들었습니다. 차가 다니지 않는 안전한 길이라 아이들과 함께 걷기 좋아 보였고, 그곳에서 바라보는 시내 풍경도 일품이었습니다. 다리 아래 그룬트 마을은 과거 성벽의 보호를 받지 못하던 가난한 사람들의 땅이었다는데, 지금은 평화로운 풍경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보크 포대 안쪽으로 들어가 보면 총 20킬로미터에 달하는 미로 같은 길이 이어집니다. 시대에 따라 포대로, 감옥으로, 연극 무대로 쓰였던 이 공간이 지금은 관광 자원이 되었습니다. 보크 포대 위로 올라가면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발코니라 불리는 전망대가 나오는데, 실제로 그 풍경을 본 사람이라면 이 표현을 부정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천년 동안 인접 강대국의 침략을 버텨낸 룩셈부르크인들의 의지가 성벽 곳곳에 스며 있는 것 같았습니다.

동화 속 마을 비안덴과 과거를 지우지 않는 벨발

비안덴은 440미터 산꼭대기에 웅장한 성이 자리하고, 그 아래로 작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입니다. 마치 동화 속 한 장면 같은 풍경인데, 이곳에서 빅토르 위고의 흉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조각가는 로댕이라고 하더군요. 망명 시절 위고가 살았던 집은 지금 박물관이 되어 있는데, 그가 창밖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지 궁금해졌습니다.

비안덴 성은 11세기에 세워진 곳으로 유럽에서 손꼽힐 만큼 규모가 컸다고 합니다. 상속 분쟁으로 많은 물품이 사라지는 아픔을 겪었지만 지금은 국유지가 되어 잘 관리되고 있습니다. 성 안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건 중세 시대 의자였습니다. 높은 사람이 앉았을 것 같은 중후한 의자인데, 아래쪽이 열리도록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오물을 그냥 창밖으로 버렸다니 성 밑을 지나가던 사람들은 어땠을지 상상이 안 됩니다. 동화 같은 마을이라는 첫인상과 달리 현실은 냉혹했던 거죠.

성 안에는 엄청나게 깊은 우물이 있는데, 성의 높이만큼 우물도 깊다 보니 커다란 도르래 장치를 이용해 물을 길었다고 합니다. 천 년 전 사람들이 이 물로 목을 축였다는 생각을 하니 왠지 성스럽게 느껴졌습니다. 비안덴 성을 나와 북쪽으로 올라가면 리프트를 탈 수 있는데, 위에서 내려다보는 마을의 지붕들이 마치 미술 작품처럼 보였다고 합니다. 천 년 동안 그 모습을 잃지 않고 버텨준 마을에게 고마운 마음까지 든다는 표현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레탈 지역은 유럽에서 작은 스위스라고도 불리는 곳입니다. 2억 년 전까지 바다 밑바닥이었다는 이곳에는 거대한 기암괴석들이 펼쳐져 있습니다. 28킬로미터 상급 코스부터 5킬로미터 초보 코스까지 다양한 트래킹 코스가 있는데, 거대한 암석 틈 사이를 걷는 재미가 일품이라고 합니다. 군데군데 구멍이 송송 뚫린 암석은 거대한 벌집 같았고, 암석 내부의 수분과 칼슘이 말라 생긴 현상이라고 하더군요. 그곳에서 마신 물은 소금기가 약간 있어서 옛날 이곳이 바다였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벨발 지역은 또 다른 룩셈부르크를 보여줍니다. 룩셈부르크 초기 부흥을 일으켰던 제철 공장 설비들과 새로 생긴 신식 대학 건물들이 오묘하게 공존하고 있습니다. 가동을 멈춘 공장의 낡은 모습이 SF 영화 같으면서도 오히려 새로워 보이는 게 신기했습니다. 제철소 꼭대기까지 올라가면 프랑스까지 시원하게 보이는 전망이 펼쳐지는데, 옛 공장과 신식 건물의 조화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옛것을 버리지 않고 그것을 기반으로 발전해 가는 모습이야말로 룩셈부르크만의 정체성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다큐를 보면서 저는 룩셈부르크가 단순히 부유한 소국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전쟁의 흔적과 계급의 역사 같은 어두운 면도 그대로 간직하면서 관광 자원으로 활용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과거의 아픔을 지우지 않고 현재와 공존시키는 태도가 진정한 역사의식이 아닐까요. 관광지 중심의 시선이라는 한계는 있지만, 그럼에도 룩셈부르크만의 독특한 매력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직접 가서 그 성벽 위를 걸어보고 싶습니다.

 

참고: https://youtu.be/mq3YgiTPp8E?si=bVyEtDrMvN2Ow-5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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