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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의 수도는 어디였나 (요동반도, 비파형동검, 평양천도)

by oboemoon 2026. 1. 24.

고조선은 우리 역사의 시작점이지만, 그 실체는 여전히 논쟁 속에 있습니다. 단군신화와 역사 기록 사이에서, 유물과 문헌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고조선의 모습이 조금씩 드러나고 있습니다. 특히 수도의 위치를 둘러싼 논의는 단순한 지리적 문제가 아니라, 고조선의 국력과 영토 범위, 그리고 우리 고대사의 무게중심을 어디에 둘 것인가 하는 본질적 질문과 연결됩니다. 이 글에서는 비파형동검과 고인돌이라는 물질적 증거를 따라가며, 요동에서 평양으로 이어지는 고조선 수도의 변천 과정을 살펴봅니다.

 

비파형동검이 말하는 고조선의 초기 중심지, 요동반도

 

고조선을 대표하는 유물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비파형동검입니다. 악기 비파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 이 청동검은 검신과 검 손잡이, 검자루 맞추개 등 세 부분으로 나뉘는 조립식 구조가 특징입니다. 이러한 제작 습관은 다른 동아시아 청동검과 명확히 구별되는 고조선만의 문화적 아이덴티티였습니다. 기원전 8세기경부터 사용된 비파형동검은 한반도뿐 아니라 중국 만주 일대에서도 출토되는데, 흥미롭게도 수도 평양보다 만주 지역에서 더 많이 발견됩니다.
중국 요령성 조양 일대의 십이대영자 유적에서는 기원전 8세기경 청동기 유적과 함께 비파형동검이 대량 발굴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이 지역을 북방 유목민족인 동호의 본거지로 여겼으나, 출토된 토기와 농경 흔적을 종합한 결과 이는 정착 농경민인 고조선 문화로 확인되었습니다. 심양의 정가와자 유적에서도 청동 부장품과 함께 비파형동검이 나왔으며, 이는 고조선이 요소 지역에서 요동 지역까지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비파형동검의 분포를 추적하면 서쪽으로는 내몽골 지역까지, 북쪽으로는 길림과 장춘 지역까지 이어져, 중국 만주 전역이 고조선의 영향권 아래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그러나 유물 하나만으로 수도의 위치를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사용자의 비평처럼, 역사 연구는 정치적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특히 영토 문제와 연결된 고대사는 더욱 그러합니다. 중요한 것은 비파형동검이 고조선 문화권의 광범위한 확산을 보여준다는 점이며, 이는 고조선이 한반도에 국한된 소국이 아니라 만주 일대를 아우르는 강력한 정치체였음을 입증합니다. 요동반도 남단의 개주와 해성 지역에서 초기 형태의 비파형동검이 집중 발견되는 것은, 이곳이 고조선 초기 문화의 핵심 지역이었을 가능성을 높여줍니다.

 

대형 고인돌이 증명하는 정치 권력의 중심, 요동

 

고인돌은 고조선 시기를 대표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유적입니다. 세계적으로 고인돌이 가장 많은 곳이 한반도이며, 중국에서는 만주 지역에만 존재한다는 점에서 고인돌은 고조선 문화권을 가늠하는 지표가 됩니다. 강화도의 탁자형 고인돌처럼 덮개돌을 고임돌이 받치는 북방식 고인돌은 청동기 시대에 주로 만들어졌으며, 발굴 결과 비파형동검과 미송리형 토기 같은 고조선 유물이 함께 출토되어 고조선 시기 무덤임이 확인되었습니다.
북한의 대동강 유역에는 1만 기가 넘는 고인돌이 존재하며, 다양한 청동기 부장품이 발굴되어 고조선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학계의 주목을 받는 것은 엄청난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대형 고인돌입니다. 강화 고인돌처럼 덮개돌 길이가 6m를 넘는 것도 있지만, 북한의 관산리 고인돌은 뚜껑돌 무게만 80톤에서 120톤에 이릅니다. 이런 거대 고인돌을 축조하려면 최소 2,000명 이상의 조직적 노동력이 필요하며, 이는 강력한 정치체제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요동반도의 개주 석붕산 고인돌은 한반도와 요동반도를 통틀어 가장 정교하고 거대한 고인돌로, 뚜껑돌 길이가 8.6m, 폭이 5.6m에 달합니다.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도구로 정교하게 다듬었으며, 내부에는 제단이 들어갈 정도로 큰 기둥돌을 사용했습니다. 벽면에는 중국 갑골문자와 비슷하나 같은 글자가 없는 상형문자가 새겨져 있어, 후대에 그려 넣은 것이 아니라면 고조선 최초의 문자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해성시의 대형 고인돌 역시 화강암 표면을 가공해 매끈하게 만든 것으로, 축조 기술이 매우 뛰어납니다.
중국 학계는 이런 정교한 대형 고인돌이 기원전 10세기 이전에 세워졌다고 보며, 이는 평양 지역 고인돌보다 시기가 빠르고 더 세련된 것입니다. 고인돌의 규모와 축조 시기를 고려할 때, 초기 고조선의 정치체는 대동강 유역보다 요동반도 남단에서 찾는 것이 타당합니다. 권력자의 무덤이 있는 곳은 그 나라의 중심지이기 때문입니다. 사용자가 지적했듯이, 고조선의 중심이 어디였는지보다 그 문화와 영향력이 얼마나 넓었는지를 균형 있게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대형 고인돌의 분포는 요동반도가 고조선 초기의 정치·문화적 중심이었을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합니다.

 

연나라와의 전쟁과 평양 천도, 그리고 후기 고조선의 번영

 

고조선의 수도 이동을 이해하려면 당시 국제 정세를 살펴봐야 합니다. 기원전 4세기 중국은 전국시대였고, 고조선과 국경을 맞댄 연나라는 전국칠웅 중 하나였습니다. 위략에 따르면 연나라가 스스로 왕을 칭하자 고조선도 왕을 칭했으며, 심지어 연나라를 침공하려는 계획까지 세웠다고 합니다. 대부 예가 말려서 실행되지 않았지만, 이는 당시 고조선이 강병 30만을 동원할 수 있는 연나라와 비등한 국력을 가졌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기원전 300년경, 연나라 소왕은 장수 진개를 앞세워 본격적으로 고조선을 공격했습니다. 먼저 북방의 동호를 천리 바깥으로 물리친 연나라는 후방을 안정시킨 후 고조선의 영토로 몰려들었습니다. 요서 지역과 요동벌판을 침공한 연나라와의 대전쟁 결과, 고조선은 서쪽 땅 2천 리를 잃었습니다. 연나라는 만번한 지역을 새로운 국경으로 삼았는데, 중국 학계는 이를 청천강으로 보지만, 문헌 검토 결과 만번한은 문현과 번한년을 연칭한 것으로, 지금의 개주와 해성 지역입니다. 성경통지에 의하면 번한년은 해성 지역으로 추정됩니다.
요동반도에 수도 왕검성을 두고 광활한 요동평원과 요소 지역을 다스리던 고조선은, 국경이 수도 근처로 좁혀들자 한반도 내부 평양 왕검성으로 천도했습니다. 이후 진시황의 장수 몽염이 요동으로 진격하면서 고조선은 요동 지역을 완전히 상실했습니다. 그러나 진시황 사후 중원이 혼란에 빠지자 고조선은 요동 지역을 재탈환했으며, 사기는 이 시기 고조선이 "방수천리", 즉 사방 수천 리에 이르는 영토를 회복했다고 기록합니다.
평양으로 천도한 후기 고조선은 오히려 더 번성했습니다. 평양 정백동 지역에서 발굴된 800여 기의 나무무덤에서는 세형동검과 청동거울, 그리고 마차 부속구가 대량으로 출토되었습니다. 특히 남자 무덤에는 모두 마차 부속구가 나왔다는 점이 주목됩니다. 바퀴 직경이 1.6m에 달하고 바퀴살이 24개인 대형 마차, 사갓형동기와 권총형동기 같은 독특한 청동 부품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쌍두마차가 평양 거리를 누볐습니다. 이런 마차는 중국에서는 출토된 예가 없는 고조선 고유의 것으로, 후기 고조선의 높은 청동기 제작 기술과 경제력을 증명합니다.
사용자의 비평처럼, 단군 신화가 사실이냐 아니냐보다 왜 오랫동안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았는지가 더 중요할 수 있습니다. 서울 동빈고 마을 사당에서 지금도 주민들이 단군에게 제사를 지내는 모습은, 역사가 단순한 과거가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정체성과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고조선은 요동에서 시작해 연나라와의 전쟁으로 평양으로 중심을 옮겼지만, 그 문화와 영향력은 만주에서 한반도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 뿌리내렸습니다. 비파형동검에서 세형동검으로의 변화, 대형 고인돌에서 나무무덤으로의 전환, 그리고 화려한 청동 마차의 등장은 모두 고조선이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도 독자적 문화를 발전시켰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출처]
영상 제목/채널명: https://youtu.be/FmE5HYOW1ZQ?si=KmkLLAf4wyQiBB4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