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 김해시 대성동 고분군에서 발굴된 유물들이 학계를 뒤흔들고 있습니다. 금관가야 왕들의 무덤에서 쏟아져 나온 파형 동기, 금동 마구, 순장 인골 등은 기록이 부족했던 가야사를 새롭게 조명할 단서를 제공합니다. 이 유물들은 가야가 단순한 약소국이 아니라 북방문화와 해양문화를 결합한 동북아시아 무역의 주역이었음을 보여줍니다.
부여인 이주설: 대성동 고분과 라마동 고분의 놀라운 유사성
대성동 91호분과 88호분에서 발굴된 유물들은 중국 선비족의 것과 흡사하여 처음에는 선비족과의 연관성이 제기되었습니다. 금동으로 만들어진 말장식, 용무늬가 새겨진 금동 허리띠, 바람개비 모양의 파형 동기 등은 한반도에서 5세기에 이르러서야 출현한다는 기존 정설을 뒤엎는 획기적인 발굴이었습니다. 특히 91호분에서 발견된 마구들은 북방 유목민족의 문화를 강하게 드러냈고, 순장 풍습 역시 북방민족의 특징을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제작진이 중국 랴오닝성의 라마동 고분군을 조사한 결과,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라마동 고분군은 선비족이 아닌 부여인의 무덤일 가능성이 제기된 것입니다. 랴오닝성 박물관의 테니콘 교수는 라마동 고분의 무덤 형태, 목곽묘 양식, 타원형 말 안장 등이 선비족과 다르며 부여인의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실제로 라마동 고분의 직사각형 무덤 형태는 대성동 고분과 일치했고, 청동 동복, 허리띠 장식 등도 대성동 유물과 거의 똑같은 모양이었습니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형질인류학 분석 결과입니다. 선양시 문물고고학 연구소의 천산 부소장은 라마동에서 발굴된 순장자 인골을 분석한 결과, 이들이 선비족이 아닌 부여계에 속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346년 선비족의 나라 전연이 부여를 공격해 5만여 명의 포로를 끌고 간 기록이 있는데, 일부 학자들은 이때 전연의 지배를 거부하고 탈출한 부여인들이 남쪽으로 이동해 김해까지 도달했을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동일한 특징을 보이는 문화 유물들이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발견된 것은 주민 이동이 있었음을 시사하며, 부여인이 토착 세력과 연합해 가야의 지배층을 형성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습니다.
북방문화 유입: 사슴뿔 관식과 동복이 말해주는 가야의 정체성
대성동 고분에서 발견된 사슴뿔 관식은 북방문화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유물입니다. 국립 김해 박물관 보존 과학 팀이 복원한 사슴뿔은 하단의 연결 고리로 볼 때 머리에 고정시켜 관 대신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사슴과 그 뿔에 대한 숭배는 유목민족의 의식과 깊은 관련이 있으며, 신라 금관 뒤쪽의 사슴뿔 형상 장식도 이러한 북방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이번 발굴로 인해 신라 금관의 원형이 가야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까지 제기되고 있습니다.
동복, 즉 청동소도 중요한 단서입니다. 대성동 29호분에서 출토된 동복은 말을 타고 유목 생활을 하는 유목민족이 사용하던 것으로, 이동 생활을 주로 했던 그들에게 음식을 조리하는 생활 기구였습니다. 91호분에서 발견된 동복도 라마동 고분의 것과 거의 흡사한 좁은 어깨와 높게 솟은 손잡이를 가지고 있어, 가야 지배층이 북방 유목민족과 같은 문화적 배경을 공유했음을 보여줍니다. 십자 모양의 코피 고정 장식, 용 문양 말장식, 청동 말방울 등 91호분의 마구들은 모두 북방 유목민족의 문화를 드러내는 것들입니다.
순장 풍습 역시 북방민족의 특징입니다. 3세기 말부터 6세기 중엽까지 약 250년간 영남 지역에서만 한정적으로 유행했던 순장은 북방적인 풍습으로, 대성동 고분에서는 수많은 순장 인골이 양호한 상태로 보존되어 발견되었습니다. 이러한 북방문화적 요소들은 가야의 건국자들이 북방에서 내려온 집단이며, 토착 세력과 결합해 새로운 국가를 형성했다는 건국 신화의 내용과도 일치합니다. 구지봉에서 황금알 여섯 개가 담긴 상자가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신화는 외부로부터 선진 문물을 가진 집단이 도래했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해상무역 중심지: 철과 파형 동기로 연결된 동북아시아 네트워크
가야가 단순히 북방문화의 영향을 받은 내륙 국가가 아니라 해상무역의 중심지였음을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는 88호분에서 발견된 파형 동기입니다. 소용돌이 모양을 한 파형 동기는 일본을 제외하고 대성동 고분군에서만 확인되는 유물로, 88호분에서만 무려 12점이 발견되었습니다. 이는 일본의 한 고분 최대 출토량인 10개보다 많은 양입니다. 파형 동기는 일본 오키나와 현의 스이지가이 조개를 본떠 만든 방패 장식으로, 액운을 쫓아내려는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천왕 무덤에서만 나오는 귀중한 유물입니다.
가야가 일본에 수출한 것은 파형 동기가 아니라 철이었습니다. 위지 동의전에는 금관가야를 소개하면서 "국철"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나라에서 철이 나서 이것을 낙랑 지역으로부터 왜국에 이르기까지 수출했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가야인들은 풍부한 철광석을 기반으로 철정 제작 기술을 발전시켰고, 갑주와 투구 같은 전쟁 무기뿐만 아니라 다양한 철제품을 생산했습니다. 김해시 봉황동에서 발견된 최소 15m 이상으로 추정되는 배 유물은 당시 해상 교역이 활발했음을 증명합니다.
김해평야는 가야 시대에 대부분이 바다였으며, 낙동강 하류에 위치한 지리적 이점 덕분에 천혜의 항구 역할을 했습니다. 대성동의 고분을 남긴 가야의 지배층들은 바다를 통해 고도화된 철 기술을 일본 등으로 수출하고, 중국과 고대 일본의 중계 역할을 하면서 국제 무역의 중심지를 이루었습니다. 가야는 대륙 문화와 해양 문화를 결합한 거대한 동북아 네트워크의 주역이었으며, 철강국으로서 동북아시아 무역을 이끌었던 제4의 제국이었습니다.
대성동 고분 발굴은 가야가 삼국 사이에 끼인 약소국이 아니라 북방문화와 해양문화가 융합된 독자적 정체성을 가진 강국이었음을 보여줍니다. 부여인 이주설은 유물 유사성에 크게 의존한 가설이지만, 고고학적 증거들은 이를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문헌 사료가 거의 없는 가야사를 고고학만으로 복원하는 작업은 여전히 진행 중이며, 앞으로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합니다.
[출처]
영상 제목/채널명: https://youtu.be/EZetjTgWnhM?si=B5LoeDxxi1SOhenX